■ 손해나도 목매는 협상
지난 1년여 협상은 미국이 정한 협상 타결시한(4월2일)에 맞춰 협상타결을 지상 최대 목표로 내세운 정부가 철저히 미국이 정한 구도에 끌려다니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필두로 한 정부 협상단의 ‘나를 따르라’식 협상 추진에 국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다.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FTA 반대 목소리 속에서도 정부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계속되고 있다.
반덤핑 규제 완화 관련 무역구제 5개항, 전문직 비자쿼터 확보, 미 연안의 승객·화물 수송을 미국적 선박에만 허용하는 제도(존스 액트) 수정 등 우리측 핵심 요구는 미 의회 소관(법개정사항)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막혔다. 그러나 미국은 투자자·국가소송제, 자동차 세제개편, 케이블TV 프로그램 공급업체(PP)의 외국인 지분 제한(49%) 완화 요구 등을 통해 국내법령의 제·개정을 촉구했다.
협상 타결에 ‘목맨’ 정부는 쟁점마다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며 미국의 성의를 기대했지만 그럴수록 미국의 요구수위는 더 높아갔다.
우리측의 자동차 세제개편 약속에도 미국의 자동차 관세 철폐 계획안은 오리무중이고, 협상 의제도 아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검역 문제가 쇠고기 관세(40%) 철폐와 연계되는 희한한 풍경이 빚어지기에 이르렀다.
관세는 관세대로 내리고, 국제수역사무국(OIE) 5월 총회 이후 뼛조각 쇠고기도 수입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 게 우리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미 의회가 행정부에 부여한 무역촉진권한(TPA)에 따른 협상 시한에 덜미를 잡혀 제대로 반론을 펴보지도 못한 채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참여연대 이태호 협동사무처장은 “정부가 협상시한을 넘기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양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며 “조건이 안 맞으면 협상을 중단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나라의 명운이 걸린 협상에 나서면서 시한을 설정한 것 자체부터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고 비판했다. (경향신문)
■ 손해나면 당당한 포기
말레이시아 농민 200여명은 지난 14일 수도 쿠알라룸푸르 총리 관저 앞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AFP통신은 이에 대해 “이례적인 ‘항의’이며, ‘90분’ 가까이 지속된 시끄러운 시위였다”고 전했다. 이 시위는 통신이 전한 것처럼 ‘90분의 항의’에 지나지 않았으며, 한번에 수백~수만명이 몰려 연일 “한·미 FTA 반대”를 외치는 한국 시위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규모였다. 하지만 반 FTA 정서에 따른 정부의 조치는 판이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4일(미국 시간) 미국과 FTA 협상을 무기 중단한 반면, 한국 정부는 3월말까지 ‘선 타결, 후 이견 조정’이라는 카드까지 내세우며 FTA 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미국과의 협상 시작 시점도 지난해 6월로 한국과 같은 데다 쟁점분야가 농산물, 금융 등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 제소제 등으로 비슷하다. 한국보다 대외의존도가 더 큰 나라로서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을 의식해야 하는 현실도 그렇다.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같이 1997년말 아시아 외환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FTA에 대한 협상 태도는 한국과 판이하게 다르다. 말레이시아는 건축·통신·금융 등 서비스와 정부조달 분야에서 취약계층인 말레이계 원주민 우대정책(부미푸트라)에 대한 미국의 완화·폐지 주장을 “내정 간섭”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협상과는 별개”라는 논리로 쇠고기 수입 재개 등 ‘4대 선결조건’까지 미국과 합의 또는 협의하는 친절을 보였다.
말레이시아가 미국에 고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협상 시작의 ‘배경’이 달랐던 이유가 크다. 삼성경제연구소 박번순 연구위원은 “말레이시아의 경우 미국이 중국을 개방시킬 장기 목적하에 ‘구애’를 먼저 해온 측면이 있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달리 미국에 협상을 먼저 제안하고 적극 매달린 측면이 강하다. 게다가 한·미동맹이나 대북 관계 등도 미국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됐다.
전문가들은 더 근본적으로 외환위기 극복 방식의 차이가 FTA 협상 태도를 달리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철저하게 미국식 시장경제로 체질을 개편한 반면, 말레이시아는 마하티르 전 총리 지휘하에 IMF의 개입을 거부하며 스스로 외환위기를 졸업했다. 쉽게 말해 미국의 압력이 작용하기 힘든 구조란 것이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말레이시아는 기본적으로 미국식 시장경제를 가장 좋은 체제로 보지 않는다”며 “그러나 한국 정부는 당장 손해가 나더라도 미국식 시스템이 중·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생각하에 달려들었고, 이를 아는 미국이 최근 들어 쌀 개방까지 강도높게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향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