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노조삼성'의 해고노동자 관리법
"돈 받고 관계 끊고 고향 떠나라?"
▲ 삼성이 해고노동자 송수근씨에게 내민 합의서.
"삼성에서는 일정 금액의 돈을 줄테니 고향을 떠나있으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계가 어렵더라도 태어나고 평생 자란 고향을 떠나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해고 4년, 복직투쟁 4년만에 회사의 고발로 두번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삼성SDI 해고노동자 송수근(39)씨. 송씨는 현재 20개월형을 받고 절반 가량을 복역중이다. 남은 송씨의 가족들은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급기야 송씨의 팔순노모까지 나서 '1인 시위'를 벌여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송씨의 구속은 회사의 '고발'로 인한 것이지만, 송씨의 아내 박미경(34)씨는 "남편이 스스로 감옥을 택한 면도 있다"고 전한다. 박씨에 따르면 회사가 송씨의 형량이 확정되기 직전,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집회, 시위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합의서를 내밀었고, 남편은 이를 거부하며 감옥을 택했다는 것.
박씨는 "당시 삼성이 일방적인 합의서를 만들어왔으며 그 속에 '회사인근 지역을 떠날 것' 등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남편이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박씨는 "그 동안 삼성은 끊임없이 미행과 감시를 해왔는데, 이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도 삼성측이 거부했다"고 전했다.
삼성의 합의 제안 첫째, "인근지역을 떠나라"
▲ "피고소인은 회사 인근지역을 떠나... 삼성은 대여금을 지급한다"
박씨가 공개한 삼성쪽의 합의서는 '무노조 신화' 삼성의 '해고노동자 관리법'의 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합의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일단 '시끄러운' 해고자는 '얼마간의 돈'을 쥐어준 뒤 동료들과 '접촉을 끊고', 회사 인근지역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박씨가 공개한 A4용지 2매짜리 삼성의 합의서(6월 11일 울산지방법원 제출)에는 이러한 내용이 그대로 명시돼 있다.
합의서 첫장 1항에 따르면 피고소인은 "합의가 원만하게 유지되도록 노력한다는 자세를 보증하기 위해 일정 기간(3개월 이상) 고소인회사 인근지역(언양·울산·양산)을 벗어나 타지역에서 안정 및 요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씨는 "고향을 떠나 어디로 가란 말이냐"며 "환자도 아닌데 회사 인근지역을 벗어나 요양을 취하라는 것은 곧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으라는 얘기"라고 주장했다.
합의 제안 둘째, "대여금 지급… 삼성에 대해 입을 다물어라"
▲ '대여금' 지급을 위한 삼성의 조건들, "삼성에 대해선 입을 다물라?"
이 합의서의 두번째 항목은 "생활안정을 위한 인도적인 배려로 일금…을 지급한다"는 것. 이 돈은 합의서에서 '대여금'으로 표현돼 있다.
한 가지 특별한 사항은 바로 이 '대여금'의 변제에 관한 것이다. 삼성의 합의서에 따르면, 피고소인(송수근)이 어떤 조건을 '2년간' 성실히 이행했을 때 대여금이 변제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조건'이란 합의서 두 번째 장에 나와 있는 조건들을 말한다. 두 번째 장의 조건들은 아래와 같다.
"㉮...㉯고소인 삼성SDI 및 고소인 회사를 포함한 삼성그룹, 삼성그룹 계열사, 삼성그룹 임직원 등에 대하여 그 지역 및 타지역 등에서 집회 및 시위를 통해 방송, 고함, 구호 제창 등의 행위로 고소인 및 고소인관련자를 비방하거나 또한 비방하는 취지의 유인물 배포, 플랭카드 게시, 피켓팅 등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고, ㉰언론, 잡지, 유선통신 및 PC통신 등 매체를 통해 고소인과 고소인관련자를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 각종 단체에의 투서 등의 행위를 하여서도 아니 되며, ㉱고소인과 고소인관련자의 경영활동, 노사정책, 노무활동 등과 관련한 제반 사내외 활동에 직간접으로 개입하거나 이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여 선동하는 등의 제반행위를 하여서도 아니 되며...㉲"
즉 삼성의 합의조건은 '대여금을 지급할 테니 더 이상 삼성을 비방하지 말라, 이 조건이 지켜지면 대여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합의 사항을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마라?"
▲ 삼성은 '형평성'을 위해 타인에게 이러한 내용을 알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삼성은 또 이러한 "합의 사항을 다른 사람이나 제3자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합의서에 포함시켰다. 그 이유는 "다른 퇴직자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다른 퇴직자들과의 형평성 고려'를 이유로 합의 내용을 알리지 말라는 의미는 곧 '일반 퇴직자'들보다 피고소인이 '더 많은' 혜택을 입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해고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대항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무마시키려 한다는 의미다.
삼성측은 이 합의서의 끝에 "'㉮∼㉲'의 조건 중 하나라도 위반하는 경우 피고소인은 대여금을 즉시 반환하고,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또 '㉮∼㉱'의 내용을 한 건이라도 위반하면 건당 50만원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서'가 실제 법적 효력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송씨의 변호를 맡았던 한 변호사는 "만약 송씨가 이런 내용에 합의한 상태에서 그 내용을 위반했을 경우라도, 현행법상 그의 행동이 '위법'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며 "삼성의 합의서 내용이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 동안 삼성 해고노동자들의 모임인 삼성해복투 관계자들은 "삼성이 돈으로 노조운동을 무마시키고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투쟁을 그만두면 '일정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삼성의 합의서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해복투 관계자들은 삼성이 그 동안 해고자들에게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합의를 제안했고, 실제 투쟁을 하다 돌아서는 동료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송씨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삼성해복투 김학권씨는 "지난해만 해도 삼성해복투와 함께 싸우던 최모씨가 동료들과 아무런 상의 없이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며 "삼성에게 이와 유사한 합의를 제안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한편 삼성측에서는 합의서를 내밀게 된 배경과 합의 내용에 대한 어떤 언급도 회피했다. '불평등한 합의서'라는 박씨와 삼성해복투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듣기 위해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삼성SDI측에서는 응하지 않았다.
다만, 해고자 개인과 회사가 이러한 합의를 할 경우 그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이와 관련해 삼성SDI 노무관리팀의 한 간부는 "개인과 회사와의 합의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뿐 합의서 작성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내용이 포함되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김영균 기자 y2k@ohmynew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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