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천천히 할수록 좋다”
노동시장·노사관계 측면에서 남북문제 고민해야
1998년 여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독일 노조간부와 통일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40대 후반이던 그는 동서독의 통일 경험을 들려주면서 한국의 노조간부들은 통일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할 때 그가 쓴 영어 단어는 ‘fear’였다. 그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국인들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며, 통일의 열망이 대단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은 그야말로 도둑처럼 왔다”며 “누구도 통일을 준비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많은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통일 이후 노동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남한 노동운동이 열망하는 대로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노동시장은 어떻게 될 것으로 예상하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임금이 낮은 북한 노동자들의 남한 유입을 규제할 틀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있냐고도 물었다. 독일의 경우 서독의 산별노조들이 동독의 노동자조직을 흡수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에 따른 조직적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물론, ‘노동자계급’으로서도 동서독 노동자들 사이엔 너무나 차이가 컸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남북 노동자들 사이에도 교류가 이뤄져 왔다.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부터는 남북을 오가며 노동자단체끼리 행사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북한의 직총(조선직업총동맹)과 교류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협력하는 흐뭇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동자 교류가 ‘민족적’ 과제 위주로 이루어져, 한편으로 ‘계급적’ 과제는 소홀히 다뤄지지 않았던가를 되짚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2001년 북한을 방문했던 남측 노동계 인사로부터 북측의 직총 인사에게 실질적인 노동자 교류의 첫 단추로 각급 조직구조와 회원수 등 노동조직 현황, 노동력 규모나 임금 수준 등 노동시장 사정 등을 공동으로 조사 연구하는 사업을 벌이자고 제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북측 인사의 반응은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면서 직업동맹원 수 같은 기초적인 정보도 이야기해주지 않더라고 말했다.
남북 노동자 조직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고려할 때, 남북 노동계의 의식과 인식 수준이 차이가 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북한의 경우 1960년대 이후 대안의 사업체계가 도입되면서 이전까지 어느 정도 보장되었던 직업동맹의 자율성이 부정됐다.
반면, 남한의 경우는 정반대 경로로 발전이 이뤄졌는데, 노동조합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자주적인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 2003년 6월30일 개성공단 착공식. <사진=현대아산>
“제조업 공동화”와 개성공단
한때 부산지역의 대표 산업이었던 신발공장들이 개성공단으로 옮겨가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공장 이전의 배경에는 부산이 제품기획과 핵심자재 생산을 담당하고, 개성공단은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완제품 생산을 맡는 분업체계를 구축한다”는 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분업구조는 다른 산업부문으로 확산되면서 현재 노동계의 쟁점으로 떠오른 “제조업 공동화(空洞化)”를 또 다른 방향(북한과의 경제교류)으로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독일 노조간부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교류는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가능하면 폭넓게 많이 할수록 좋지만, 통일은 하루라도 늦게 가능하면 천천히 할수록 좋다”고 말했다. “민족이 하나된 환희는 잠깐이지만, 생계수단으로서의 노동은 평생 가기 때문”이란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노동시장과 노동관계”라고 그는 덧붙였다. “하나된 세상에서 남북의 노동자가 모자란 일자리를 두고 누가 더 낮은 임금을 제공하느냐로 경쟁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남북 노동계 사이는 물론 남한의 노사정 3자간에도 산업구조 비교, 노동력 분석, 투자협약 마련, 고용정책 수립 따위의 대책을 미리미리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겠냐”는 그의 냉정한 충고가 얄밉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통일운동의 달’ 6월에 남북의 노동일꾼들이 유념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윤효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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