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작성자
사회민주노동자당
작성일
2021-04-04 22:43
조회
279

한 라 산 (이산하)



서  시



혓바닥을 깨물 통곡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년 전

동아시아의 해군기지로서 조선이 결정된 지

80년의 모진 세월이 흐른 1945년 불볕 여름

한 손에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총독부가 대사관으로 바뀌였을 뿐,《창살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침략사 120여년,

다시 씌여져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잇발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누가 잊을 것인가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l948년 4월 3일《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 간

이름없는 해방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며

뼈를 깎는 모진 고문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 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 가다

진지로 돌아 가다

끝내 쓰러져 버린 그들은 갔다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 것인가

분노없이는 갈 수 없는 땅

통곡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尾帝의 각을 뜨다

적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다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 줌 피묻은 뼈가루로 날아 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30여년만에 걸어 보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뼈가루로 쌓여 있는 흰 눈이며

나무가지마다 암호를 주고 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멀리 사람 실은 배 한척, 돌 실은 배 한척, 떠나는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잎파리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 지휘하고 있었던 그 날

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안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 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 날

한 무리의 정치깡패단이 열일곱도 안 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 날,바로 그 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

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빨갱이다!》

《빨갱이의 종말은 이렇다!》

광장을 가득 메운 도민들에게 허수아비의 졸개들이

이미 죽은 시체들을 대검으로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하게 찢어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도민들은

저 건 이덕구,저 건 김운민,저 건 김병남,남진,박남해……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푸주간에 걸린 짐승일 뿐이었다

한 개의 총알이 심장을 뚫고 간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해안에서 불어 오는 모랫바람이 한라산을 미친듯이

뒤흔들고 있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멀리 관덕정 인민광장위로 지고 있었다

산은 다시 한 번 알몸이 되고

그 빈 숲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다

살아 흘러 가고 죽어 흘러 가고

마침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흘러 갔다

몸 가릴 곳 하나 없는 이 참혹한 겨울숲

마지막 몇사람이 기적치럼 살아 걷는 이 학살의 숲

누가 그 날을 기억하지 않는가

4            



돌려 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흐드러지게 피여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 주자

기름진 지주와 자본가의 살을 죽창에 꽂아

그들에게 돌려 주자

공장의 프레스에 싹둑싹둑 잘려 나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을

포크레인에 찍힌 철거민의 팔과 다리를

얼어 붙은 배추포기 같은 삶을 살다 농약 속으로 사라져 간

농민들의 그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그리고

푸르른 5월의 금남로를 승냥이처럼 할퀴고 간

저 피묻은 손을

찢어,

갈갈이,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 주자



그리하여

똑똑히 들어라

우체통이 빨간 것은 빨갱이사상에 물든 탓이 아님을

바로 너희들 때문임을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붉은 것도 바로 너희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피로 맺어진 《혈맹 우방》이여

그대들이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너희들의 칼날 위에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싹둑 잘려 나간 손가락이 아직도 팔팔 살아 뛰는

붉은 피가 있어

농약 먹은 가슴으로 타오르는 시붉은 피가 있어

탄환의 불꽃으로

탄환의 불꽃으로

저 헐벗고 굶주린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숲을 이룰 때까지

마침내 해방의 숲을 이룰 때까지

적들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 주자!!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동지의 시체를 되돌려

받자,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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