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서
출연연구기관 정상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 과기부의 "출연(연) 활성화 및 사기진작 종합대책" 발표에 부쳐 -
어제 과기부 장관은 대덕연구단지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열린 출연연구기관장 회의 자리를 빌어 "출연(연) 활성화 및 사기진작 종합대책"(이하 '종합대책'이라 함)을 발표하였다. 과기부 장관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간사위원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좁게는 출연연구기관, 넓게는 국가혁신체제 전반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종합대책은 앞으로 기획예산처, 국무조정실, 연구회 등 출연(연) 관련 정부부처 및 기관들과의 실무협의과정을 거쳐야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조건부의 제안'이다. 그러나 과기부 장관이 취임한지 몇 달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출연(연)의 이해 당사자들과 접촉하면서 출연(연)의 문제에 대하여 현황을 파악하고 나름의 대책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리 노동조합은 지난 4월 26일 과기부 장관과의 간담회 자리를 통하여 출연(연)의 현안문제 및 정상화 방안에 대하여 노동조합의 입장을 전달한 바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출연(연) 연구현장의 목소리를 전해 왔다.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출연(연)의 기능과 역할 정립, 출연(연)의 기관운영, 연구종사자들의 연구활동과 후생복지 문제를 포괄하고 있어, 과기부가 출연(연)의 연구활동과 연구종사자들의 고용조건과 신분, 후생복지에 대하여 적지 않게 고민하였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출연(연) 연구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우리 노동조합이 그 동안 제시하였던 여러 의견들이 상당히 고려되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노동조합은 과기부의 종합대책에 대하여 적지 않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과기부의 종합대책에 대한 우리 노동조합의 입장을 밝힌다.
- 다 음 -
1. 과기부가 종합대책의 현황 및 문제점에서 지적한 사항들은 올해 들어서 처음 나타난 문제가 아니며, '90년대 중반이후 계속 지적되어 왔던 것들이다. 이번에 과기부가 출연(연)의 현안문제에 대하여 발표한 종합대책은 기획예산처가 출연(연)에 경영혁신지침을 강요하기 위하여 기관고유사업비 예산배정을 유보함으로써 초래된 출연(연) 운영의 파국적 상황과 이에 대한 연구기관 종사자들의 폭발적인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수습책으로서 제시되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부가 출연(연)을 정부의 획일적인 지침으로 뒤흔들 만큼 뒤흔들어 놓고 상황수습이 어려워지자 서둘러 '사기진작책'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는 과기부의 종합대책을 바라보면서 "우는 아기 떡 하나 주어 보자"라는 고압적인 자세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는가 라는 의심을 여전히 지우지 못한다.
우리 노동조합은 정부가 이러저러한 대책을 발표하기 이전에,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불법적 경영혁신지침으로 출연(연)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무모한 파괴적 정책을 지금이라도 당장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한 손으로는 출연(연)의 목줄을 쥐고 뺨따귀를 후려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누가 그랬지'하는 자세는 개혁과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현 정부의 정책이념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이다. 출연(연)은 조삼모사의 간교한 술책에 놀아나는 원숭이가 아니다.
2.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출연(연) 연구활동 정상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담고 있다. 이 제안은 '출연(연)의 기능 및 역할 정립', '출연(연)의 안정적 연구비/인건비 지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긍정적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주요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다.
현재 출연연구기관은 부족 인건비와 경상운영비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기부의 종합대책이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상황에서 출연(연)은 연구기관으로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과중하게 외부수탁과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많은 연구자들은 스스로를 '보따리 장수'라고 자조하고 있다. 기관의 설립목표를 살릴 기관고유사업의 착실한 추진은 이미 생각할 처지가 못되고, 막말로 돈이 되는 외부수탁과제를 닥치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바꿔보고자 과기부는 정부출연인건비 비중을 현행 35% 수준에서 50%까지 늘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노동조합은 정부출연인건비의 비중이 기관에 따른 편차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70% 수준까지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재 정부출연인건비의 비중이 50%를 넘는 출연(연)의 연구활동의 현실을 고려할 때 매우 현실적인 주장이다. 50%의 인건비를 외부에서 벌어와야 하는 상황에서 출연(연)이 자신의 설립목적에 부합하는 공익적 연구사업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아울러 경쟁적 연구환경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이후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PBS제도의 전면 재검토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기부의 종합대책이 PBS 제도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과기부는 '한국형 PBS제도 정착'을 선언하면서 PBS제도의 전부처 확대를 서둘러 발표하기 이전에, PBS 제도의 근원적 취지가 무엇이고 그 실행과정상에서 변질된 점과 부작용은 무엇인가를 철저히 파헤쳐, 철폐든 발전적 개혁이든 PBS제도를 근원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섣부른 구호성 정책보다는 연구현장의 현실과 연구활동의 속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기초한 현실적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아쉬운 시점이다.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출연(연)의 기능 및 역할 정립과 관련하여 출연(연)을 둘러싼 현재의 제도적 환경을 그대로 둔 채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출연(연)의 정상화를 위한 제도적·법률적 환경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현재의 연합이사회체제에 대한 문제점 지적 등 그 동안의 문제제기들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출연(연)의 현안문제를 미봉책이 아니라 근원에서부터 철저히 바로잡는다는 자세로 연합이사회 체제를 전면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3. 과기부 종합대책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출연(연) 연구종사자들의 후생복지 확충과 인센티브 강화 방안이다. 이 방안을 접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분노를 삭여야 한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이후 '98년부터 추진해온 출연(연)에 대한 구조조정과 경영혁신 강요로, 출연(연) 연구종사자들의 근로조건은 계속 악화되어 왔다. 올해에도 기획예산처는 예산수시배정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출연(연)에 경영혁신지침을 강요하면서 출연(연) 종사자들의 후생복지 축소를 밀어붙이고 있다. 기획예산처의 이러한 초법적 조치는 단체협약과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부정하며 출연(연)의 노사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노동법 위반, 자율적 노사관계 파괴라는 초법적 행위를 저지르면서 출연(연) 종사자들의 후생복지/근로조건의 축소와 악화를 강요하고 있는 현 정부가 사기진작이라는 명목으로 후생복지 확충과 인센티브 강화를 부르짖고 있는 것은 어색하다 못해 민망하기까지 하다. 여기에서도 정부는 이러저러한 대책을 내세우기에 앞서, 노사간의 자율적인 단체협약으로 체결된 멀쩡한 근로조건들을 경영혁신지침으로 개악하려 하면서 비롯된 출연(연)의 그 동안의 엄청난 혼란과 파행을 반성하고 현 사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전체 출연(연) 종사자에게 굳게 다짐해야 한다.
정부는 일방적인 경영혁신 지침 강요와 예산배정유보로 빚어진 출연(연)의 연구활동과 기관운영의 파국에 대하여 해당정책입안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며, 부당한 정부 지침에 맞서 싸우다 구속되거나 형사처벌을 받은 출연(연) 종사자들에 대해서도 결자해지의 자세로 모든 사법적 조치를 취하하는 등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할 일들이 적지 않다. 정부는 번지르르한 정책을 내세우기에 앞서 출연(연)을 현재와 같은 지경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먼저 제거하고 억울한 피해자들을 즉각 구제해야 한다. 이것이 일의 순서에도 맞고 출연(연) 종사자들의 상처 난 자긍심을 어루만지고 떨어진 사기도 올릴 수 있는 길이다. 행여 정부가 자신들의 정책적 오류를 금전적 보상 강화로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이 될 것이다.
출연(연)에 대한 2000년도 기관평가보고서도,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경영혁신 강행으로 비롯된 연봉제 도입과 복리후생 축소, 비정규직 양산이 출연(연)의 연구활동 정상화와 종사자들의 사기진작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공공기술연구회, 『2000년도 기관평가 종합평가보고서』 참조). 우리 노동조합은 출연(연) 연구활동의 정상화를 위하여 정부가 현재의 축소/파괴지향적 정책기조를 버리고, 연봉제의 전면 재검토, 복리후생 대폭확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시급히 실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몇 몇 정책입안자들의 알량한 소신을 충족시키기 위해 출연(연)의 연구활동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4. 우리 노동조합은 출연(연)의 연구활동 정상화를 위해서는 출연(연)을 둘러싼 제도적·법률적 환경의 정비와 아울러 출연(연)의 진지한 내부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다. 진정으로 연구활동의 생산성과 창의성을 높이려면 출연(연) 내부적으로도 해야할 일은 적지 않다. 함량미달 기관장의 전횡과 독선 타파, 관료적 수직적 조직구조(보직자 중심 의사결정 구조) 혁파와 일하는 자 중심의 수평적 조직구조 및 의사결정 구조 실현, 연구비 배분의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 연구종사자들의 합의를 통한 공정한 평가제도의 확립, 기관고유사업과 외부수탁사업의 적정균형유지를 통한 출연(연)의 정체성 확립 등 출연(연) 내부혁신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것은 출연(연) 내·외부 시스템 개혁의 문제이지, 강압적 경영혁신지침으로 후생복지비용 몇 푼 줄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혁이 그 이름에 걸맞는 내용으로 채워지려면 그것은 이해당사자들의 자발성과 자기 각성에 근거해야 한다. 강요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개혁이 아니다. 압력에 못 이겨 잠시 바뀐 듯하나 곧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우리 노동조합은 앞에서 지적한 출연(연) 내부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정부부처와 얼마든지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부는 각종 지침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강요할 것이 아니라, 출연(연)이 진지한 내부 개혁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격려하고 촉구해야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최근 정부가 출연(연)에 낙하산 인사를 강압적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낙하산 인사에 대해서는 이미(5월 10일) 우리 노동조합의 입장을 밝힌 바 있기에 여기에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5.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정부가 경영혁신 과정에서 출연(연) 종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뿌리내린 우리 나라의 정부치고는 아주 이례적인 솔직한 고백이다. 때문에 우리 노동조합은 정부가 출연(연)에 대한 중요 정책이나 개혁과제를 설정할 때 노동조합, 기관경영진, 정부 사이의 충분하고 진지한 사전협의와 토론을 거칠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한다. 기획예산처의 무모한 예산배정유보조치와 그것이 초래한 출연(연)의 기관운영 파행과 노사관계 악화에서도 드러났듯이, 이해당사자들의 충분한 사전협의와 토론은 불필요한 갈등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도화되어야 한다. 덧붙여 말한다면, 출연(연)의 개혁과 정상화는 국가혁신체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정책과제이므로, 국가혁신체제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조정해야 할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주도적으로 관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 노동조합은 이러한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이것과 관련하여 기획예산처, 과기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사이의 진지한 검토가 있기를 기대한다.
과기부의 종합대책이 밝히고 있듯이, 종합대책의 실현은 여러 차례의 협의와 의견수렴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정부가 각종 협의와 의견수렴과정에서 우리 노동조합을 포함한 주요 이해당사자들이 협상과 대화의 진지한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 이것만이 현 정부가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처음에 지적하였듯이, 과기부의 종합대책은 긍정적인 측면들을 많이 담고 있고, 그 준비과정에서도 출연(연) 이해당사자들과 대화하려 노력하였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노동조합은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과기부의 종합대책에 대하여 매서운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비판은 과기부의 종합대책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나 거부가 아니며 생산적인 대화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문제제기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짧은 글이 과기부의 종합대책의 장단점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우리 노동조합이 상황수습용의 혐의가 짙은 '사기진작책' 수준의 대안이 아니라 출연(연) 정상화를 위한 본격적 정책대안을 준비중에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흔히 과학기술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 한다. 국가혁신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출연(연) 연구활동의 정상화를 위하여, 우리 노동조합은 과기부, 기획예산처, 국무조정실 등 과학기술관련 주요 정부부처, 출연(연) 기관장협의회, 시민사회단체 등 주요 이해당사자들과 열린 자세로 언제든지 토론하고 협의할 자세가 되어있다. 이 글은 진지한 토론과 협의의 초대장이다.
2001년 5월 24일
민주노총 공공연맹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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