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민주노동 대전본부 사회공공성강화위원장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노사관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 내년 1월 초에 만료되는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교섭 준비과정에서 출연연을 포함하여 14개 기관이 교섭권을 특정 노무법인에 위임했고 노조는 이에 반발하여 내년 상반기부터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자. 교과부 산하 9개 출연연 사용자가 교섭권을 노무법인에 위임한 것은 지난 3월이었다. 그보다 앞서 지난해 12월말에 이들 출연연은 일제히 노조에게 교섭을 요청했다.
사용자가 먼저 단체협약 개정안을 마련해 교섭을 요청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유효기간이 1년 이상 남아있는 단체협약을 갱신하자고 요구한 것도 출연연의 노사관계에서 처음 발생한 사건이다. 노동법 시행령에 따르면 노조가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시기는 단체협약 유효기간 만료일 이전 3개월이 되는 날부터이다.
이명박 정부의 노사관계 선진화가 문제였다.
지난해 초에 초임 삭감, 정원 축소 등 경영효율화 조치를 강제했던 정부가 중반을 지나면서 노골적으로 단체협약 개악을 밀어붙인 것이다. 여러 공공기관의 단체협약이 잇따라 해지된 상황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던 출연연 사용자들은 단체협약을 정부 지침에 맞게 개악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자 했고, 유효기간이 1년 이상 남았다는 점은 개의치 않았다.
노조는 전례도 없고 황당하기도 한 사용자들의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했다. 교섭의 필요성이나 취지(노사관계 선진화 및 경영합리화)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신의와 성실의 원칙에 따라 교섭에 적극 임하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노조가 두 달여 동안 4차례에 걸쳐 교섭을 요청했지만 사용자는 묵묵부답이었다.
교섭을 요청한 당사자들이 교섭을 회피하다니!
그러던 중에 난데없이, 교섭권을 위임받았으니 교섭에 응해달라는 노무법인의 공문이 노조에 전달됐다.
사용자가 제3자에게 교섭권을 위임하는 것은 법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사용자가 교섭권을 위임했을 때 노사관계가 파행으로 치닫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노조로서는 오랜 기간 노사가 함께 만들어온 단체협약을 제3자에게 맡기는 행위를 노조를 부정하는 폭거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작년에 공공기관에서 가장 긴 파업을 벌였던 한국노동연구원의 경우도 교섭권을 위임한 채 사용자 대표가 교섭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연연 사용자들이 교섭권을 위임하고 나서 9개월이 또 지났다. 단체협약 유효기간 만료일이 이제는 열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교섭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교섭권을 위임한 기관은 더 늘어났다. 내년 1월부터는 이들 기관에서도 법에 따라 타임오프를 활용해야 노조 간부의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타임오프에 관한 사항까지 일괄해서 교섭해야 한다는 노무법인의 조언에 따라 아예 타임오프 교섭을 회피하고 있다. 출연연에서 노조 간부들의 임금지급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예고되고 있다.
사용자가 교섭을 요청하고 교섭권을 위임하던 때와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다르다. 작년에는 정부가 공공기관의 단체협약을 개악하는 것에 매달렸다면, 성과연봉제와 이진아웃제 등 새로운 지침이 현재 출연연을 압박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기술자들을 하루살이 인생으로 전락시켰던 PBS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출연연 구조개편에 관한 정부의 방침은 한달 후면 확정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문제를 자율적으로 풀지 못하는 출연연 사용자들의 상황 인식이 안타깝다. 출연연의 위기에 대해서 공감한다면 노조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공동으로 대응방안을 찾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