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하게 후순위 집회신고를 묵살하는 경찰의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대전지법 제1행정부(재판장 최병준 부장판사)는 지난 11일 전국비정규직여성노조가 대전동부경찰서장을 상대로 낸 옥외집회금지통고처분 취소소송과 관련해 신청인(여성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는 “철도공사의 장기간 위장 독점집회에 대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라며 법원의 판결을 환영했다.
▲ 노조와 사측의 집회신고 전쟁
전국비정규여성노조는 지난달 8일 오전 8시 30분 동부경찰서를 찾았다. 10월 14일 대전역 동광장에서 결의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집회신고서를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지없이 동부서 정보과 사무실 앞에서 승강이가 벌어졌다. 철도공사 직원과 접수 순위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럴 것 같아 오전 8시 50분경 정보과 사무실에 들어가 1순위임을 표시했지만 경찰로부터 면박을 당한 채 사무실 밖으로 밀려났고, 철도공사 직원과의 힘 대결에서 밀려 집회신고서를 접수하지 못했다”고 여성노조 측은 주장했다.
결국 10월 14일 대전역 동광장은 철도공사의 차지가 됐다. 여성노조는 며칠 뒤 다시 동부서를 찾아 2010년 10월 14일과 1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대전역 동광장에서 조합원 570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연금환수반대 및 최저낙찰제 입찰금지 결의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의 옥외집회신고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예정된 결과였다. 노조의 집회 장소와 시간에 이미 신고된 집회(철도공사)가 있고, 집회의 목적으로 봐서 서로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후순위로 접수된 여성노조의 집회를 금지한다고 경찰은 통보했다. 철도공사의 집요한 방어 집회에 밀려 10월 14일 철도공사에 대한 국정감사에 맞춰 국회의원들에게 하소연하려고 했던 여성노조의 실낱 같은 기회는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 후순위 집회 전면불허…기본권 제한
여성노조는 경찰의 결정에 불복해 곧바로 대전지법에 행정처분효력정지 소송을 제기했다. 여성노조의 힘겨운 싸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묻어 있었고, 재판부는 이 같은 노조의 신청을 인용해 경찰의 옥외집회금지통보에 대해 효력을 정지시켰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만일 두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충돌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예상되더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는 집시법 등 관련법에서 허용된 경찰력을 동원해 평화로운 집회가 이뤄지도록 예방하거나 제지할 수 있는지 여부를 먼저 고려해 집회신고 허용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데, 경찰은 이 같은 입법목적에 대한 고려 없이 막연히 뒤에 접수됐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후순위 집회신고를 전면 불허한 것은 합리적 근거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철도공사의 방어집회도 재판부의 결정에 반영됐다. 재판부는 철도공사가 지난 7월 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매일 대전역 동광장에 대한 집회신고를 독점한 것과 관련, “실제 집회를 개최하지 않은 날이 훨씬 더 많고 개최된 집회도 1시간 남짓에 불과하며 참가자도 일반 시민이 아니라 참석예정 인원에 훨씬 못 미치는 자체 직원만 참가할 뿐이었던 점으로 미뤄 4개월에 걸친 철도공사의 집회신고는 제3자의 집회를 사실상 어렵게 할 목적으로, 형식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철도공사의 허위집회신고를 인정하고 한 공간에서도 집회가 양립 가능하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다. 환영한다”면서도 “재벌과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경찰의 옹호적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집회신고를 둘러싼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만큼 관련 법과 제도에 대한 합리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소송을 통해 ‘집회보다 더 어려운 집회신고’를 경험하며 힘겹게 집회를 쟁취한 여성노조는 14일 오전 9시 대전역 동광장에서 한국철도공사를 규탄하는 눈물의 집회를 연다.
